*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1970년대-찰리 조지 만세

원조 스킨헤드 출신 축구선수에 이어, 찰리 조지는 1970년 12월 <데일리 익스프레스>에게 최초의 '축구 히피'라는 별명까지 받게 된다. 찰리의 경기 방식이 사랑과 평화란 가치를 드높였다는 뜻은 아닌 게 분명하다. 시즌 초 이브닝 스탠다드와 한 인터뷰에 그가 이미 공언한 바 있다. "어떤 놈이든 날 치기만 한다면 걸레로 만들어주겠다." 아직 카메라가 경기장 전체를 비추던 시절이 아니라서, 70년대 축구의 거친 선수들을 상대로 한 그의 복수극을 조명하기 위해서 아스날 팬들의 증언을 모았다. 심판의 뒤통수를 휘갈기고, 종종 관중들에게 윙크까지 날렸다. "찰리 조지 양, 핸드백은 어디 두고 왔어요?"라는 야유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심판들을 향해 욕설을 날렸다.

  그럼에도 최소한 겉으로는 찰리는 70년대의 다른 괴짜들인 마쉬, 보울스, 허드슨, 워딩턴과 비교하면 훨씬 수수께끼 같고 애매모호한 인물이었다. 이런 점이 타인들이 찰리 조지라는 인물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70년대 초, 알렉스 솔스는 찰리가 태어난 곳인 할러웨이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다. "많은 어린 아스날 팬들이 찰리 조지가 아스날에서 뛸 때 머리를 자르러 왔지. 처음에는 간단했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마자 '찰리 조지처럼 해 주세요.'라고 해. 그거야 쉽지, 바리깡으로 쓱 밀고 집에 보내면 되니까. 그런데 1970년 말쯤 되니까 그 친구들이 가게에 오지를 않더라구. 내가 생채기라도 냈나 싶었지. 그런데 어느날 점심 먹으로 나가니 그 아이들이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있는거야. 내가 물었지. '스킨헤드 아니었니, 그 히피족 머리는 뭐야?' 그러자 아이들이 웃더라고. '그건 관뒀어요. 찰리 조지가 요즘은 머리를 기르고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진짜 가치보다 이미지에 더 관심이 있다는 거야. 스킨헤드와 히피들이 보통 공통점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축구선수들이 얼마나 패션에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어. 요즘은 베컴의 헤어스타일이 그렇지. 하지만 찰리가 선구자였어."

  스티브 애쉬포드는 알렉스 솔스의 설명이 너무 간단하다고 평했다. "그 아이들은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머리를 기른 것 뿐입니다. 찰리 때문이 아니에요." 30년 후, 본인이 스티브 애쉬포드의 말에 강하게 동의했다. "또 이 이야기군요. 내 머리가 어떻고 내 위치가 어떻고. 당시,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머리를 길게 길렀죠. 저도 따라한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축구선수로서, 사람들이 따라하는 것 정도는 받아들여야 했어요."

  1970-71 시즌의 처음 네 달동안, 이발소를 가지 않고 버티던 히피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그들의 영웅이
에버튼의 골키퍼 고든 웨스트와 충돌하여 발목을 분질렀기 때문이다. 하이버리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이라곤 노스 뱅크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다리 근육을 다시 만들고 있는 모습 뿐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어쨌거나, 그가 신년 초에 복귀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구세주처럼 반겼다. 프랭크 맥린톡이 말했다. "어딜 봐서 우리가 지루한 팀입니까. 조지 그레이엄, 레이 케네디, 조지 암스트롱의 축구가 칙칙합니까. 우리는 또한 열심히 훈련하는 튼튼한 팀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축구팀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이점은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더군요. 하지만 찰리가 우리에게 돌아오자 팀에 특별한 무언가를 부여했습니다. 우리들의 최종병기였지요. 온갖 곳에 패스를 뿌릴 수 있었죠. 공을 최소한 덜 띄우고 바로 슈팅으로 연결할 수 있엇습니다. 그때 축구공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데요. 또 그는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당시에는 힘든 일이었죠. 시즌 중간에 그의 복귀는 새 선수를 영입한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오래 뛴 선수들은 그가 아스날에 입단할 때부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맥린톡이 말을 이었다. "찰리의 관점에서 세상에는 대단한 놈과 병신들 밖에 없었죠. 그 중간이 없었어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대단한 것은 클럽에 처음 왔을때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를 돌아보며 욕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죠. '프랭크, 그딴 것도 패스라고 주냐.'" 특유의 런던 억양으로 그르렁거렸죠. 게다가 전 주장인데다가 나이도 열살이나 더 먹었다니까요. 하지만 그러니까 찰리죠. 겁이 없었어요." 밥 윌슨은 처음에 아마추어 선수로 입단하였고, 그의 처음 목표는 학교 교사였다. 윌슨이 말했다. "제가 잠시 찰리의 선생님이었던 적이 있죠. 할러웨이의 학교로 가서 축구를 가르쳤어요. 모든 아이들이 저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찰리는 '야 밥, 뭐하냐?'라고 하더군요. 괜히 배짱을 퉁기려는 것이 아니라, 천성이 그랬던거죠. 제가 골대에 써있으면, 그가 돌파해서 들어오며 제게 소리를 질렀죠. '밥, 어디로 넣어줄까? 왼쪽, 오른쪽, 아니면 가랑이?' 건방지기 짝이 없죠! 하지만 큰소리 떵떵 칠만한 재능이 있었어요."

  2005년에 축구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위너가 조지의 축구 지능에 대해 통찰력 있는 기사를 써냈다. 다음 인용구는 위너가 <타임스>에 게재한 인터뷰에서 따온 것인데, 그가 하이버리에서 왜 그렇게 찬란한 축구를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그가 버티 미와 왜 좋은 관계를 다질 수 없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어린 시절 정상적인 피치라고 볼 수 없는 곳에서 스스로 기술을 갈고 닦았다. 공원에서 하는 길거리축구, 자갈밭, 그의 집인 아파트 뒤쪽의 풀밭.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동네 놀이터였다. '골대 사이는 60야드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장애물이 널려있었지. 그네, 목마, 나무, 울타리. 선수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까지 잘 피해야했지…
…. 공이 어느 방향으로 오든 간에 상관 없어. 내가 올바른 곳으로 다시 차면 되니까. 나만 잘 맞춰가면 되는 일이야. 균형을 잃어도 공을 찰 수 있었지. 사람들이 나보고 '그런 식으로 하면 안돼지. 이렇게 해야해.'라고 하는데 전부 개소리야. 나한테 축구를 가르치려 들지마.'"

  1971년 4월의 뉴캐슬 전이야말로 그의 위력을 보여주는데 가장 적합한 경기일 것이다. 당시 리즈를 승점 5점차로 쫓고 있던 아스날의 선수들은 이미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뉴캐슬의 주장 보비 몬커는 조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있었고, 조지는 슬슬 성질이 나고 있었다. 밥 윌슨이 설명햇다. "찰리는 지나치게 경직되어있었고, 경기 전부터 신경통이 있었습니다. 가끔, 완전히 혼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하프 타임 때 괜찮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죠. 하지만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이것이 곧 그의 장점이었습니다. 그가 발이 묶여 있을 때에도 남은 시간 동안 무언가 상황을 뒤바꿀 능력이 있었다고 스스로 믿었어요." 조지 암스트롱이 말했다. "그 경기에서, 그저 우리에게는 운이 너무 안 따랐고 관중들은 날카로워졌어요. 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짜증이 나 보였고, 몬커는 그를 완전 파묻을 기세였지. 결국, 찰리가 눈이 뒤집혀서 몬커의 목을 조르려고 했어. '개새끼야 그만 좀 따라다녀, 알까게 해준다.' 그가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때 저는 바로 옆에 서 있는데, 깜짝 놀랐어요. 보비는 원래 침착한 사람이지만, 이 경우에는 결국 찰리의 말이 현실이 되었거든요."

  경기종료를 10분 앞두고, 조지가 박스 구석에서 주인 없는 공을 채갔다. 그러더니 벽에 대고 축구를 하는 것처럼
몬커의 다리에 공을 튕겨 다시 받아내었다. 그리고 뉴캐슬의 골대 구석에 왼발 강슛을 때려넣었다. 노스 뱅크가 열광하고, 조지는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머리카락은 레이스 달린 컽튼처럼 그의 얼굴을 덮었다. 아스날의 70년대를 추억하라면 빠지지 않는 광경이지만, 조지는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그저 할 수 있는한 쎄게 찬 것 뿐입니다. 해낸 것이구요. 기분이 꽤 좋긴 했습니다."

  경기는 <매치 오브 더 데이>에서 생방송되었다. 그의 오랜 공백 끝에, 다른 클럽의 팬들에게 그가 무사히 진정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그때부터, 그가 매주 상대팀 서포터들에게 받는 야유의 목소리가 커졌다. 조지 암스트롱이 말을 이었다. "시즌 말에, 하이버리에서 스토크와의 경기를 치렀습니다. 스토크가 원정을 오면 팬들도 많이 따라옵니다. 4,000명 정도의 서포터들이 모두 찰리에게 야유를 퍼붓더군요. 그들 모두가 '핸드백은 어디 두고 왔니?'라고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자 아스날 팬들이 받아쳤어요. '하이버리의 제왕으로 태어났네'라고. 이 중요한 고지에서 우리는 1-0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찰리에게 야유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만합니다. 그 같은 선수들의 숙명이죠. 그냥 괜찮다고 생각해주지 않아요. 열광하거나 경멸하죠. 찰리는 늘 지하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끝나면, 팬들과 같이 열차 안에 있었어요. 팬들의 눈높이에 있는 선수였죠. 오늘날의 선수들하고 사뭇 다릅니다."

  몇 주 후, 리버풀과의 FA컵 결승전에서 조지가 결승골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후 그가 하이버리에서 다시 골맛을 보기까지는 10개월이 걸렸다. 아스날의 가장 밝은 별이 벌써 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가르칠 수 없었던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그를 되살릴 수 없었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2000년대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Posted by 시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