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1970년대-불세출의 천재

<이슬링턴 가제트>에서 1999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이버리 거주민의 30 퍼센트 정도가 아일랜드계 조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캠든이나 킬번 같은 근처의 여러 지역에서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그러니 아스날 팬들 중 상당수가 아일랜드 해 건너 뿌리가 있다 해도 썩 놀랍지는 않다.

  세계 2차 대전이 터지자 아일랜드 인들이 하이버리로 이주해오는 숫자가 늘었다. 이스트 스탠드의 시즌 티켓 보유자 마이클 플린이 설명했다. "1939년에 아일랜드의 실업률은 매우 높았어. 코크나 더블린 같은 곳에서는 거의 60퍼센트에 육박했으니까. 전쟁이 시작하자, 영국의 공장들, 특히 군수품 공장들이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질렀거든. 그래서 더블린, 코크, 그리고 벨파스트의 아일랜드인들이 떼를 지어 간 거지. 전쟁 때 만든 탄환의 80퍼센트는 아일랜드 인의 손때가 묻어있을 거야.

  나는 킹스 크로스 근방의 군수품 공장에서 일을 얻었어. 솔직히 내가 좋은 대접 받았다고는 말 못하겠네. 내 친구 몇몇은 잠잘 곳도 찾지 못했어. '아일랜드 인 출입 금지' 같은 팻말이 걸려있는 집이 많았고, 공장에서는 잉글랜드 애들이 참 싫은 눈치로 우리를 쳐다보았지. '너네 촌동네로 돌아가지 그러냐, 거지 새끼들.'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쳐다니고, 또 우리끼리는 자주 놀러 나가니까 잉글랜드 사람들 눈초리가 곱지 못했지. 힘들었어. 우리는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그 사람들은 뚱해 있었지. 내 기억에는 그랬다는 거야.

  전쟁이 계속되니까, 사람들 태도가 좀 변했어. 그들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또 우리가 그들에게 익숙해졌지. 남자들이 전장에 끌려가서 여자들이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 영국 친구들 몇명하고 축구 같이 보러가자고 했어. '아스날 보러 화이트 하트 레인 갈 생각인데, 같이 갈래?' 이렇게 묻더군. 전쟁 중에는 아스날 홈구장이 거기였거든, 나와 내 친구들은 바로 따라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잉글랜드 친구들에게 노래하도록 가르쳤지.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게일식 축구를 하면서 늘 노래를 부르는 민족이라고. 그래서 잉글랜드에서도 똑같이 한 거지. 그 빌어먹을 머리, 어깨, 무릎, 발 모두 뻣뻣한 잉글랜드 사람들. 그 사람들은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아스날이 하이버리로 돌아갔어. 아일랜드 인과 이탈리아 인들이 관중들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했지. 하이버리의 관중들은 늘 다국적 집단이었어. 좋은 일이잖아. 잉글랜드 인들만 있었으면 하이버리 경기장이 아니라 하이버리 도서관이라고 이름을 바꿨어야 했을 거야!"

   1970년대 말, 하이버리는 사실상 아일랜드계 아스날 팬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테리 닐 감독, 아일랜드 국가대표 데이비드 오리어리, 프랭크 스테이플튼, 존 디바인, 리암 브래디, 그리고 북아일랜드 출신의 팻 제닝스, 팻 라이스, 새미 넬슨까지. 테리 닐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반 인종차별법 때문에 그리 스쿼드를 짠 것은 결코 아니오. 그 선수들 대부분은 어느 팀에 들어갔어도 주전이었을 거요. 클럽이 아일랜드에 구축한 훌륭한 스카우트망 덕이지. 내가 감독이 될 무렵 그들 대부분이 1군으로 진입했던 것이고. 그러니까 내가 아일랜드 출신선수들을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해석이기는 하다만 사실은 아니지."

  1978년, 런던의 타블로이드에서 아스날을 '런던의 아일랜드 팀'이라 명명했다. 또한 드레싱 룸에 아일랜드계 파벌이 있어, 다른 파벌들과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보도를 했다. 팻 제닝스는 부인했다. "파벌 이야기가 참 많았고, 우리가 클럽을 통제한다느니 하는 말도 많았지요. 자극적인 소재로 한 탕 해보려는 게으른 기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에요. 실상 우리들끼리도 잘 뭉치는 편이 아니었어요. 저와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좋은 친구였지만, 프랭크 스테이플턴은 늘 혼자 시간을 보냈습니다. 리암 브래디와 가장 친한 사람은 그레이엄 릭스였고요. 아일랜드 마피아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지요. 기자 하나가 이리 물어보던데요. '팀 내 정치적인 문제나 신조에 대해 당신들 모두 의견이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저는 정말 권력싸움 같은 거에 하등 상관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의 신조 같은 것을 염두하려고 애썼습니다. 결코 싸운 적이 없어요. 우린 동료였고, 서로 잘 지냈습니다."

  클럽은 '런던의 아일랜드 팀'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1979년 FA컵 결승전에 불린 '슈퍼 아스날'이라는 곡은 아일랜드의 유명한 민요에서 곡을 따왔다. 결승전에서 맨유를 격파한 이후, BBC 촬영진은 팀 버스 안의 아스날 선수들이 코치진들까지 함께 아일랜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잡아냈다. 아스날 팬들의 눈에는, 그 런던의 아일랜드 사람들 중 단 한 명이 다른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존재였다.

  마이클 플린 씨가 말을 이었다. "고해성사 한다는 심정으로 말할테니 잘 들어. 리암 브래디는 불세출의 천재야. 진짜 천재라고. 물론 아일랜드 식으로 말야. 그가 곧 시인이었어. 그가 곧 창조자였어. 그가 곧 축구계의 조지 버나드 쇼였고 제임스 조이스였지. 우상처럼 우뚝 선 지성으로 경기장 위에서 전혀 다른 언어를 토해냈지. 그리고 종종 별세계의 사람처럼 보였어. 라커룸에서는 아일랜드 선배인 조니 자일스처럼 명료하고 뚜렷한 주관을 보여주었지. 왼발까지 그 기이한 아일랜드식 천재성이 담겨있었어. 그 아일랜드스럽다는 것이 중요해. 다른 하이버리의 영웅들, 예를 들면 찰리 조지와 토니 아담스는 잉글랜드다움이 느껴지잖아. 다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선수들이지. 그게 바로 잉글랜드 인의 몸짓이야. '저리 들어가'라든가 '힘 좀 내봐' 같은 소리를 지르지. 그게 바로 참호에서 쓸만한 언어거든. 아담스는 주먹을 쥐고 엄지를 세우고, 찰리는 손가락 욕을 하고 공격적이지만, 리암은 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 하기 보다는 그저 열심히 뛰었지. 관중들도 찰리와 아담스, 그리고 이안 라이트에게는 환호성을 지르지만 리암은 다르게 대했어. 집중에서 감상을 하잖아. 그것도 애정이 맞지만, 표현 방식이 다른 거지. 아일랜드 바람 맞고 자란 사람이 아스날 팬 되기 딱 좋은 때는 정말 70년대 후반이었지. 노스 뱅크는 아일랜드 삼색기로 미어터졌어. 정말 아일랜드 교민회 같았다니까."

  브래디는 1973년에 아직 파벌이 지배하는 아스날로 들어와 금새 1군 주전이 되었다. 어린 브래디는 드레싱 룸에서도 처세를 잘 했고, 이는 버티 미가 이끄는 부진하고 붕괴되는 스쿼드에서는 꼭 필요한 재능이었다. 또다른 아일랜드 인이었던 테리 만시니는 이렇게 말했다. "리암은 말하는데 우물쭐물한 적이 없어요. 존 자일스 생각이 나더군요. 피치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실력에 자신이 있었던 사람이에요." 미의 해임이 임박하자, 볼과 만시니가 주축이 된 파벌은 보비 캠벨을 새 감독으로 원했으나, 브래디와 다른 선수들은 새 감독이 오길 바랐다. 아스날 팬들의 입장에서는 뽀글파마를 한 찰리 조지가 아스날을 떠났기 때문에 느낀 실망감을 브래디와 프랭크 스테이플턴이 메꿔주는 셈이었다. 축구 기고가인 데이비드 위너가 말했다. "찰리가 새상 물정에 밝긴 했지만, 결코 현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겨우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스날을 떠나야 했지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브래디는 매우 영리한 기수였다.

  브래드의 전 동료였던 말콤 맥도날드는 침을 튀기며 브래디의 실력을 찬양하였다. "리암은 같이 뛰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완벽한 스루 패스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모든 스트라이커의 꿈이죠. 오른발, 왼발, 그리고 그 놀라운 기술로 살짝 공을 감아서요. 다른 모든 위대한 선수들처럼 균형감각도 뛰어났어요. 그리 빠르지는 못했지만, 놀랄만큼 부드러웠습니다. 공을 리암에게 주면 우리 나머지는 잡담을 하면서 그저 상대편 페널티 구역으로 설설 들어가면 됐어요. 공이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요. 그러고보니 특유의 슈팅도 있었지요. 현란하게 눈을 속이며 공을 원하는 곳으로 꽂아넣었죠. 1978-79 시즌 초반의 리즈 전에서 아크를 그리며 아름답게 꽂힌 골도 있었죠. 다른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그도 똑 부러졌어요.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움직일 수 있었죠. 다만 리암은 다른 모든 위대한 선수들처럼 타이틀을 원했어요. 타이틀을 얻지 못하니 문제가 생겼죠."

  70년대 말 내내 브래디의 위상은 점점 커졌고, <선>이 리버풀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이적 루머에 대해 언급한 이후, 그가 하이버리에 잔류할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아스날이 1979년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압하며 다시 강자로 부상할 조짐을 보여주었음에도, 브래디의 리그 우승이나 유럽 챔피언에 대한 욕망을 식히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선>의 기사가 나간 후, <이슬링턴 가제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만 아스날 팬들은 현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관두고, 남은 시간을 즐기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이슬링턴 가제트>가 조심스럽게 꽤 좋은 문장을 지었다고 할만 하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2000년대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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