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1960년대-두 스탠드 이야기

1960년 중반, 클락 엔드와 이제 공식적으로 노스 뱅크로 지칭되는 런드리 엔드가 고유한 정체성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아스날 팬들이 언제부터 '노스 뱅크'라는 이름을 썼는지 날자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전 BBC 기자인 토니 왓츠의 견해로는 1964년 BBC에서 열린 '콥 콰이어 대회' 쯤이라고 한다.

  "어느 팀 팬이 가장 시끄러운지 알아보는 재밌는 일이었지요.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60년대 중반에는 사람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러기 시작했다는 거에요. 신문에서는 우리가 연 대회 때문이라고 짚었어요. 팬들이, 특히 10대들이 다 같이 노래를 하면 엄청난 열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구요. 그런데 그건 너무 단순한 해석 같아요. 비틀즈 열풍을 살펴보는건 어떨까요. 갑자기 젊은이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었잖아요, 전에는 없던 현상입니다. 축구장까지 퍼진 겁니다. 안필드에서 사람들이 'She Loves You'나 'Ferry Cross the Mersey'같은 곡을 불러요. 거기서 시작해서 다른 경기장까지 퍼졌어요. 그리고 <매치 오브 더 데이>가 방영을 시작해서, 다른 데서 하는 것을 따라하기 쉬워졌죠.

  10대 청소년들이 나라 방방곳곳에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전보다 노래를 훨씬 많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라운드 한 쪽 스탠드를 완전히 장악을 한 것이에요. 그들의 요새가 되었어요, 그들이 군집하는 곳이었죠. 축구가 더더욱 집단적이 되었습니다. 맨유 팬들은 스트레트포드 엔드에 진을 치고 있고, 첼시 팬들에게는 셰드가 그러했죠. 그리고 아스날은, 바로 노스 뱅크입니다. 옛이름인 런드리 엔드보다는 훨씬 강렬한 이름같지 않아요?"

  1963년, 아스날은 67,986명의 관중이 움집한 가운데 스퍼즈와 4-4 무승부를 기록한다. 최소한 공식 집계는 그러하다. 실제 경기장에 모인 관중은 75,000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스날은 스퍼즈에게 4-2로 끌려다니다가 조 베이커의 늦은 추격골과 조프 스트롱의 동점골로 경기를 매듭지었다. 이어 클락 엔드는 관중이 몰려 무너졌고, 100명이 넘는 관중들이 세인트 존 병원의 응급요원들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경기 후반 아스날의 폭발적인 활약 때문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증거가 두 가지 있다.

  조 베이커가 말했다. "제가 3번째 골을 성공시켰을 때, 클락 엔드 쪽으로 가서 세레모니를 했습니다. 아스날 팬들이 앞쪽에서 난리를 치고 있었는데 뒷쪽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스퍼즈 팬들이 뒤쪽에 몰려있다는 말이겠죠. 그 순간 스퍼즈 팬들이 사람들을 밀치기 시작한걸 봤습니다. 아스날 팬들이 앞쪽으로 거칠게 앞쪽으로 밀려갔어요. 그때 사람들이 다쳤고, 저는 처음으로 경기장에서 서서 경기를 본다는 것이 위험한 일로 번질 수도 있다고 깨달았죠. 그런데, 심지어는 원정 팬들이 사람이 많을 때 고의적으로 남을 다치게 한 경우도 있어요. 원정 팬들이 점점 클락 엔드로 몰려들더군요. 같은 경기에서 스퍼즈가 득점했을 때는, 노스 뱅크에서 별 움직임이 없었거든요. 그전까지만 해도 홈팀 원정팀 팬 안 가리고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1963년 쯤 되면 원정 팬들이 더 이상 홈 팬들 사이에 껴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기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이상 노스 뱅크에 발도 못 들이죠."

   존 스텁스가 베이커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노스 뱅크가 아이들 놀이터가 되기 시작했지. 그 전에,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사람이 없고 천장도 있는 노스 뱅크로 가자고 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지들은 안 오고 애들만 잔뜩이야. 노스 뱅크는 이제 우리 땅이고, 여기서 마음대로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욕설 퍼부어도 됐어. 학교에서 교사가 없을 때랑 비슷하지. 맘대로 할 수 있잖아? 그러자 나이 좀 먹으면 아버지들이 '그래, 이제 너 혼자서도 충분하겠구나.'하며 클락 엔드에 가시거나, 이스트 혹은 웨스트 스탠드에 앉아 보거나, 아예 굳이 오지를 않아. 축구가 위험해진건 그런 이유도 있어. 어른들이 영향력이 사라졌으니.

  이게 또 가족 해체 현상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16살일때 자기 아빠랑 경기 보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일단 아버지가 옆에 없으며, 술도 맘대로 마시지. 당시에는, 하이버리 근처 술집들은 거리 사람들 좀 끌어오려고 일찍 문을 열었어. 생각을 해보라고, 어른들이 없다면 애들이 뭔 짓인들 못하겠어? 죽어라 퍼마시는 거지. 그래서 노스 뱅크가 갑자기 고래고래 노래 부르는 만취 상태의 애들로만 가득찬 거야. '아스날, 아스날'로 시작해. 그러다가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응원하지.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점점 문제가 생겼어."

  1960년대부터 클락 엔드에 오는 원정 팬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브리티시 레일과 축구 협회가 '축구 특급열차'를 배정했기 때문이다. 리버풀과 에버튼의 팬들은 아스날 지하철 역에 늦게 도착해도, 클락 엔드까지 5분이면 도착했다. 존 스텁스가 이어 말했다. "빨간색, 혹은 파란색 리버풀 놈들이 떠들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대. 한참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려. 60년대 초에 1부 리그로 돌아왔는데, 걔들 때문에 입석 서포터의 개념이 변했어."

  대런 자비스의 눈에 1960년대의 젊은 아스날 팬들이 있을 곳이라곤 노스 뱅크뿐이었다. "통과의례 같은 거였어. 아버지가 노스 뱅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게 이렇게 말을 하셨지. '세상에, 너는 거기 안 갈거지? 무섭다. 그냥 삼촌하고 이스트 스탠드 위쪽에 앉지 그러니.' 내가 그럴 리가 없지. 노스 뱅크는 아빠 몰래 술 마시고 담배 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잖아. 그리고 월요일날 학교에 가서, 애들이 주말에 뭐했냐고 물어보면 노스 뱅크에 갔다고 자랑하지. 그러면 애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봐. 어릴 때는 다 그렇잖아."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2000년대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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