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이 실려있던 앨범의 제목인 Kill the Moonlight는 이탈리아의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의 미래파선언에서 따왔다고 하는군요. 미래파는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좀 과격한 예술사조였는데...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자는 주장을 했어요. 과거로부터 발전하자도 아니에요. 그냥 다 끊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하자는 거죠. 그래서 달빛마저 죽여버려야 할 대상이었고요. 스푼이 미래파 선언에서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스푼의 이 앨범과 직전 앨범은 과거의 어떤 밴드가 영향을 줬다고 하기도 그렇고, 이후의 어떤 밴드가 영향을 받았다기도 하기도 그런 이상한 앨범이죠. 특히 2번트랙이었던 The Way We Get By에서 정점을 찍는데...이 이야기는 좀 나중에.

스푼은 챈호팍이 전설적인 먹튀로 이름을 날린 텍사스 출신의 밴드입니다. 텍사스 출신 유명밴드가 별로 없어요. 텍사스 사람들은 밴드 음악은 안 듣고, 카우보이 모자 쓰고 소떼 몰고...선거철이 오면 다 같이 공화당을 찍으러 가죠. 여튼 뭐 음악을 신나게 가지고 놀고 지지고 볶는 뉴욕 같은 곳과는 확연히 다른 곳에서 홀로 외롭게 음악을 한 셈이지요. 원래 스푼은 픽시스나 가이디드 바이 보이시즈처럼 로우파이 음악을 하는 밴드였거든요. 98년에 A Series of Sneaks라는 앨범을 발표하는데, 스타일이 많이 달라요. 지금 스푼이라면 앨범 낼 때 인터루드 절대 안 쓰거든요. 그땐 썼어요.

나름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고 텍사신 씬에서 제법 인기가 있으니 대형레이블에서 스카웃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위에 말한 앨범이 나왔는데...문제는 약속한 만큼 홍보비를 투입 안 해주고 결국 스푼과의 계약을 해지해요. 스타가 되나보다 기대했다가 졸지에 다시 인디로 내려앉은 스푼은 이때부터 자기들만의 음악을 하기 시작하죠. 스푼은 미니멀리즘의 정점을 찍기로 결심합니다.

이 앨범 직전에 나온 앨범 Girls Can Tell이 2001년에 나왔어요. 그니까 1년만에 앨범이 나온건데, 사실 키보드의 비중이 1년사이 커진 것 빼고는 방향이 큰 차이가 없는 앨범이에요. Girls Can Tell이 더 직선적인 것 같기도 하네요. 진짜 2000년대 초반 아무리 뒤져봐도 이렇게 특이하면서도 사람 귀에 쏙 들어오는 앨범 없어요.

왜 특이하냐면...사실 구성요소가 굉장히 단순해요. 기타리프는 굉장히 단순하고, 보컬은 허접하고, 드럼은 메트로늄 수준이고, 키보드 소리는 들어가기는 하는데 진짜 음 몇 개만 찍듯이 들어가요. 그럼 결과물이 그냥 단순하고 빈틈이 많거나...잘 만들어도 금새 질려야 정상인 건데, 막상 결과물은 소리의 공백마저 곡의 건조한 공기를 살려주죠. 노래 전체적으로 약간의 비장함과 긴장감까지 서려있어요. 힘이 있다는 거죠. 진짜 좋으면서도 특이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죠.

저 두 앨범 통틀어 좋은 곡 많긴 한데, 왜 하필 The Way We Get By냐면...이 곡이 그 중에서도 훅이 좋긴 하지만...피아노가 메인이 되는 곡이라서 그래요. 피아노가 메인이 되는 게 대단한 건 아니죠. 킨 같은 피아노만 치는 밴드도 있는데요. 문제는 스푼이 기본적으로 기타록 밴드라는 거예요. 기타록 밴드들이 피아노곡 안 만드는 건 아니지만, 보통 피아노곡 만들 때는 부드럽고 늘어지는 트랙을 만들지, 이렇게 본인들 기타치는 것처럼 차갑게 만들지는 않아요. 그렇게 The Way We Get By는 기타록 밴드가 만든, 기타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런데 2000년대 나온 어떤 피아노록도 따라잡지 못하는 긴장감과 에너지를 가진 곡이 되어버렸죠...


2013. 3. 20.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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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앤 세바스챤은 누더기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사회주의의 아이들이라고 하면 멋지겠지만, 그건 뻥이니까요. 푼돈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굴러갔죠. 돼지같은 공무원의 주머니 속에 있는 잔돈. 청년 직업 훈련 프로그램 따위를 만들어서 상사 실적 쌓아주는 사람. 장부 숫자를 조작해서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 신뢰를 쌓기 위해 창녀와 잔 사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Me and the Major, 그대로 해석하면 나와 소령님은 벨 앤 세바스챤의 두 번째 앨범인 If You're Feeling Sinister의 수록곡입니다. 위에 인용구는 앨범 자켓 제일 뒷페이지에 있는 밴드소개에서 한 문단을 가져온 건데...걸작이죠. 벨 앤 세바스챤은 앨범 자켓 보는 맛에 앨범을 모아요. 가끔 보면 이상한 인생상담도 해주고, 이상한 칼럼도 쓰고 그러는데 역시 이 앨범의 밴드소개만큼 걸작이 없죠. 웃퍼요.

노래는 들어보면 쉽게 알겠지만 멜로디는 밝고, 사운드는 경쾌하고 분위기는 따듯한데 가사는 따로 놀아요. 보통 많은 밴드들이 세상이 망해서 불만인 음악을 하거든요. 기타에 디스토션을 걸어가면서 아이 시바 좆같은 세상아ㅏ아아아아아아아...이러는데 벨 앤 세바스챤은 이들과는 달리 세상이 덜 망해서 불만인 음악을 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망하다 마는 바람에 지들만 망한 거예요. 다들 망하면 공평하기라도 하죠.

곡이 96년 곡이잖아요. 지금보면 사운드나 멜로디가 좋긴 하지만 새로운 건 없거든요. 그새 벨 앤 세바스챤도 비슷한 스타일을 잇고 또 이어간 중견밴드가 되었구요. 근데 당시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면 당시에는 꽤 새로웠던 것도 같고요. 90년대 밴드 중 딱히 비슷한 밴드가 안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런데 역시 벨 앤 세바스챤 하면 멜로디고 사운드고 다 제껴놓고 저는 가사가 제일 인상 깊거든요. 이 다음 앨범의 첫 곡의 첫 줄이 아마, "그는 24살에 뇌졸증으로 쓰러졌어요, 그렇지만 않았어도 잘 나갈 수도 있었는데"로 기억해요. 황당하죠. 하지만 만약 제가 가사를 쓴다면 가장 쓰고 싶은 스타일의 가사이기도 해요. 벨 앤 세바스챤이 세상에서 제일 가사를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유머도 아픔도 모두 진짜처럼 느껴져서 좋아요.

군대 가기 전에는 이 다음 트랙인 Like Dylan in the Movies라는 곡을 좋아했는데, 갔다오니까 소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곡이 눈에 막 띄더라고요. 노래의 주인공하고 영국군 소령이 우연히 기차 같은 칸에 들어가서 대화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는 거죠. 소령은 요즘 젊은이들은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죄다 군대 보내야된다고 하고, 주인공은 그냥 듣고만 있지만, 노친내들이 우리 탓만 한다고 생각해요.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 가사 한 번 읽어보세요. 좋아요.


2013.3.16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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