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1980년대-야유 받은 친구들: 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

80년대 초, 맨체스터 시티와 울브스 같은 팀을 몰락 직전까지 몰아놓은 이적료 폭등 이후 축구계는 소강기를 맞았다. 브래디와 스테이플턴을 각각 유벤투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넘긴 후, 아스날 팬들은 그들이 더 이상 축구 시장의 주역이 아님을 깨닫고 말았다. 마땅한 까닭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하이버리에서는 위기론이 돌고 있었다. 폴 베센이 회상했다. "아스날이 리암과 프랭크를 보냈자 구단 분위기는 더 처참하기도 힘들었죠.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제일 잘하던 선수 둘이 떠나고 테리 닐이 데려온 선수들로 그 자리를 메꾸려니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1976년 아스날 감독에 취임한 이래 닐은 실력이 떨어지는 미봉책 같은 선수들이 잘해주기를 기대하는 행동을 반복하였다.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그들 대부분은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북아일랜드 출신 감독인 닐의 바겐세일은 1970년대 후반, 이제 막 싹 터가는 호주 축구에서 호주 국가대표 존 코스미나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데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코스미나 아마 지구 반대편에서는 찬란한 재능이었겟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윌리 영에 따르면 그는 '여태까지 살면서 본 호주인 중 유일하게 자신감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후에 테리 닐은 그것은 영국 날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고, 코스미나는 훈련 중에 양털 코트를 입었어야 했다고 밝혔다.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의 UEFA컵 경기가 그의 최악의 순간이었다. 심판이 피치 위의 마크 힐리와 그를 교체하러 대기중이었는데, 코스미나가 사라져 있었다. 힐리가 피치에서 빠지자 아스날은 열 명이 되었고, 레드 스타가 결승골을 넣어 승리를 거머쥐었다. 코스미나가 사라진 이유는 딱 하나. 그가 말했다. "볼일을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었어요."

  1981년, 앨런 선더랜드의 득점이 프랭크 스테이플턴의 이적과 함께 줄어드는 것을 보고, 닐은 존 홀리와 레이 한킨을 합쳐 50,000 파운드에 데려왔다. 원래 둘은 모두 한 시즌에 20골을 넣어주는 최고의 선수들이었지만, 그들 모두 전성기가 지난지 오래였다. 한킨은 적정 몸무게보다 13kg이나 더 나가고 있었고, 겨우 두 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리버풀 전에는 교체로 나와 상대편 페널티 에어리어로 들어가던 와중에 홀로 넘어졌고, 상대 감독 케니 달글리쉬를 웃기고 말았다. 하이버리에서 한 달 동안 있더니 그는 곧 미국으로 훌렁 떠나버렸다. 홀리의 선수시절이 더 성공적이라면 성공적일터이다. 15경기에서 3골을 넣었으니. 하이버리 관중들이 때만 되면 그에게 야유를 했다. 테리 닐은 2부리그에서도 홀리가 골을 넣기 힘들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홀리가 홀로 모든 비난의 퐈화를 맞게했다. 골골대는 2부리그 공격수가 1부리그에서 새 삶을 찾기란 힘든 것이었다. 브라이언 맥더못이 이렇게 말했다. "이 경우 관중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것이지요. 돈을 냈고, 본 것에 도저히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 것이니까요."

  두 선수 모두 아스날 시절에 대해서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킨은 "할 말 없소"라고 짤막하게 답했던 반면에, 홀리의 이유는 좀 더 구체적이다. "하이버리의 암흑기 때 제가 한 일은 없으니까요. 저도 알고, 팬들도 압니다. 저는 진짜 아스날 선수였던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말을 아끼는 편이 좋겠군요." 아스날 팬 그레이엄 화이트는 그 암흑기를 너무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코벤트리나 버밍엄 같은 시시껄렁한 상대랑 붙어도 많으면 많아봤짜 20,000명이야. 사태가 더 심해졌을 수도 있었어. 당신이 존 홀리가 어땠냐고 물었는데, 피터 니콜라스, 리 채프먼, 폴 베센…이런 놈들에서 한 번 골라 보라구. 이런 놈들이 피치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거야. 나도 알아, '리암 브래디는 세상에 하나 뿐' 같은 응원가 부르는 게 그놈들에게 자신감을 주진 못할 거라는 건. 하지만 그놈들은 우리 스스로를 비참하게 하잖아. 그래서 야유했지. 그러니까, 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거 밖에 없는가? 이런 심정이었지. 그 못하는 놈들 중 가장 못하는 놈은 리 채프먼이었어. 나귀 같은 것이었지. 테리 닐이 웃기게도 '천재 소년'이라고 떠들어댔는데, 무려 500,000 파운드에 사왔어. 브래디를 팔고 받은 돈의 반 정도 되었지. 이스트 스탠드에서 내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놈이 공을 잡을 때마다 우는 소리 하고 화가 나서 손을 치켜들고 하던게 다 기억이 나. 퍼스트 터치가 참 끔찍했어. 그래도 나이 먹으면서 괜찮아지긴 했다면, 여전히 재앙 같은 영입이었지."

  1981년 10월, 아스날은 벨기에의 아마츄어팀 빈터슬라크에게 UEFA컵 경기를 지면서 정점을 찍었다. 회계사, 제빵사, 목수들로 이루어진 팀에게 1-0으로 1차전을 패하고, 홈에서 2-1로 이겼지만 원정골 규정으로 인해 탈락한다. 평소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타임스> 마저 다음날 이렇게 적었다. "이제 빈터슬라크마저 아스날에게 굴욕을 주다." 벤치에서는 윌리 영과 테리 닐이 또 언쟁 중이었다. 닐이 재계약을 두고 난항을 겪고 있는 영을 선발명단에서 빼고 대신 크리스 와이트를 집어넣었다. 벨기에에서, 영은 빈터슬라크의 네트에 공을 꽂아넣었지만 공격자 반칙으로 인해 골이 취소되었다. 하이버리에서 시간이 점점 줄어들 때마다, 관중들은 '윌리, 윌리' 악을 썼다. 영은 닐에게 그를 교체로 들여보내달라고 촉구했다. 닐은 고개 한 번 까닥이지 않았다. 영이 말했다. "경기 끝나고 테리에게 당신의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떨어졌다고 말했어. 빈터슬라크의 수비수들은 날 무서워했고 테리도 잘 알거든. 그리고 최소한 내가 들어갔으면 폴 베센을 악몽에서 끄집어 낼 수는 있었잖아."  관중들 대부분이 베센이 공을 받을 때마다 '베센 교체, 베센 교체'를 외쳤는데, 그 증오의 물결이 팀동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많은 선수들이 이슬링턴 가제트 지면에서 팬들을 비판했다.

  수년 후, 헤로인 중독에서 겨우 헤쳐나오고 있던 베센은 하이버리 관중들의 대우에 여전히 씁쓸해하고 있었다. "정말 축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있어요.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신적 강인함을 말하는 것이지. 선생님이 보시다시피(이 시점에서 그는 덜덜 떠는 손을 들여올렸는데, 이는 분명 약물 중독의 신호다.) 저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못 되요. 관중들은 참 이상해요. 제가 처음 팀에 들어와 프랭크 스테이플턴 밑에서 배울 때는 참 친절했어요. 제가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토리노에서 넣었던 골, 그리고 스퍼즈 전에서 넣었던 헤딩 골이 제게 유예기간을 조금 준 셈이죠. 머릿속으로는, 유벤투스 전에서 골을 넣었을 때, 아 이제 해냈구나 싶었지요. 언론들이 제게 달라붙었고, 저도 살짝 꿍꿍이가 있어서 눈을 축구공이 아니라 다른데로 돌려보려 했죠.

  다음 한 발을 내딛고 1군 주전이 되어야 할 때, 갑자기 모든게 변했어요. 관중들의 시선이 달라졌어요. 이제 더 이상 할일을 배우는 소년이 아니라, 직접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구요. 1군 주전이 된다는 것은 관중석의 불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문제는 당시 아스날 팬들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죠. 리암과 프랭크가 가버려서 모두 단단히 화가 나 있었어요. 갑자기 호의가 싹 가셨죠. '왜 베센은 스테이플턴만큼 못 할까? 프랭크라면 해냈을 텐데.' 가은 거요. 제가 찬스를 놓치면, 그들의 참을성도 같이 사라지죠. 빈터슬라크 경기는, 그건 정말 모욕 그 자체였어요. 1년 후에 결국 제 선수생활을 끝장낸 무릎 부상이 이미 그때부터 제 몸놀림을 제약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전해 크리스마스 때 제가 손목을 그었다는 비밀은 일파만파 퍼져서 비밀도 아니게 되버렸지요. 아스날에서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 심했어요. 수년 동안, 서포터들 때문에 너무 상심했어요. 클럽에서도 케니 샌섬 같은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일을 그만두고 나서도 돈을 챙겨주었죠. 유소년 팀을 졸업하고 난 이후, 돈을 제대로 벌어본 적이 없어요. 겨우 스물 세 살에 아무것도 없이 끝나버렸죠.

  하지만 아스날 팬들을 꽤 오랫동안 미워했어요. 나 같이 그들 팀을 위해 뛰는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어요. 당시 그레이엄 릭스와 케니 샌섬 같은 사람들은 불평분자 따윈 무시하고 집에 가서 잊으라고 했어요. 바로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그들은 그런 것을 버텨낼 정신력이 있었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다구요. 14년이 지났고 이제 더 이상 원은 없어요. 팬들은 돈을 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할 권리가 있구요. 제가 빈터슬라크 전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은 사실 사치겠죠. 요즘은 관중들이 절 응원했던 선수생활 초창기만 생각해요. 다만, 그 시절 추억은 가물가물 하네요."

  2001년 8월, 폴 베센은 브리스톨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그는 메타돈 치료를 받는 중이었는데, 지역 신문에 따르면 그의 혈액의 약물 농도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2000년대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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