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태동기-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

리엔트, 스퍼즈, 그리고 첼시의 대표단이 '가능한 최대한 강경하게' 울위치 아스날을 하이버리로 이전하겠다는 노리스의 계획에 반발했다. 그들은 런던[각주:1]에 새 팀이 생긴다면 자신들의 기존 팬층을 갉아먹을까봐 걱정한 것이다. <토튼햄 헤럴드>의 만평에서는 노리스를 마치 바스커빌 가의 개처럼[각주:2] 스파이크 달린 목걸이를 하고, 농장을 기웃거리며 토튼햄의 닭들을 갈기갈기 찢어 식량을 훔쳐갈 태세를 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FA에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노리스는 그의 친구들과 같이 위원회를 구슬리며 쓸만한 정보를 주었다. 인구 400,000의 버밍햄과 인구 250,000의 쉐필드에 리그 최강의 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구 200만명도 넘기고 끝없이 확장중인 런던에서 네 팀 정도 수용 못할리가 있겠냐고 말이다. 위원회는 역시나 고소한 측에 '방해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토튼햄 헤럴드'는 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광고를 게제했다. "…노리스가 이끌고 온 울위치의 불법 침입자들 경기를 보러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기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다음 문제는 하이버리에 살고 있던 강경한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대문짝 앞에 "프로 축구의 부정한 면모"이자 "저열한 계획"의 산물이 생긴다는 것에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슬링턴 구청(The Islington Borough Council)의 기록에는 하이버리 파크 거주자였던 컨벤튼 씨의 발언이 적혀있다. "이 마을에 재앙이 될 것 같은 이번 계획을 구청에서 막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베넬 가(Avenell Road)에 사는 A. 베일리 씨는 이렇게 적었다. "울위치 아스날이 이 곳에 세울 고층의 스탠드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상당한 정신적 고통과 불편함에 시달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청에서 조치를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이슬링턴 가제트>의 기자인 헨리 월러(Henry Waller)가 1913년 2월에 쓴 글은 더 구체적이다. "저 침입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날은 이 지역민 모두가 슬퍼해야 할 날이다. 모범적이고 마을한 동네가 소란스러운 폭도들과, 두렵게도 음주의 중심이 되고 말 것이다. 하이버리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이 계획을 온몸으로 막아야한다. 울위치 아스날이 그들이 있어야 할 켄트에서 공을 차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짤막하게 말해서 여기는 그들이 있을 있을 곳이 아니다."

  노리스는 님비의 본질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지역 행정에도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는 경기장이 주거지 사이에 생겨도 별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고, 매 토요일마다 30,000명이 넘는 손님들은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반대자들을 강하게 설득했다. 많은 반대자들이 이에 동조하여 건설 과정 동안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항의를 계속하던 사람들은 노리스가 지역 언론 인맥을 통해 완벽히 차단했다. 하이버리 사람들은,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속에 사는 것처럼 이전 반대 계획 회의는 결코 열리지 않았고, 반대 모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믿고 말았다. 나치당의 대중 선동 담당자였던 괴벨스에 맞먹는 검열 기술로 노리스의 동료들은 반대자들에게 대중의 관심을 완전히 차단시켰고, 결국 이전 반대 운동의 깃발은 꺾이고 말았다.

  레슬리 앤더슨(Leslie Anderson)의 아버지인 도날드 앤더스(Donald Anderson)은 울위치 아스날의 하이버리 이전을 반대한 지역 주민 중 하나다. 나는 1990년대 초에 레슬리 앤더슨씨를 인터뷰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노리스의 도저히 꺾을 수 없었던 추진력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는 노리스를 사업상 이유로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허튼 짓은 용납하지 않는 분이셨고, 세계 대전에서 4년 동안 참호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끝까지 살아남으셨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노리스 만은 두려워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노리스를 만나고 돌아오시면 벌벌 떨면서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키셨죠. 당시 노리스 같은 사람이 많았지요. 사회 지위를 이용해 어떤 비열한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가 항의하는 사람에게 명령하는 듯 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고, 결국 모두 무시 당했죠. 그 사람들 중 일부가 아스날이 하이버리에서 첫 경기를 하던 날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울위치로 돌아가라'고 쓴 커다란 현수막을 걸기도 했지요. 하지만 노리스가 경찰을 동원해서 어쩔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서장과 노리스는 매우 친한 친구였는데다가 둘 다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결국 아스날은 새 자리를 지켜낸 셈이죠."

  노리스의 마지막 장애물은, 그리고 절대 쉽게 굴복시킬수 없는 상대는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교구의 높은 분들은 대개 축구가 '반종교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영국국교회가 축구 클럽에게 땅을 파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리스의 손은 교회 상부까지 닿아 있었다. 20,000파운드 수표를 눈 앞에서 설렁설렁 흔들어대니, 교회 위원은 떡밥을 물었고, 노리스의 오랜 친구인 캔터배리의 대주교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노리스는 성일(聖日)에는 경기를 하지 않기로, 또한 절대 '해로운 액체'를 경기장에서 팔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일년도 채 안되서, 그는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약속을 깡그리 무시했다. 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은 기존의 종교 대신 축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악마같이 비열한 회장이 운영하는 잉글랜드 내 가장 성스럽지 못한 축구 클럽이 예비 사제들이 볼링과 테니스를 즐기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에 하이버리 경기장을 짓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적절하기도 하다.

  노리스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어도, 대부분의 하이버리 사람들이 울위치 아스날의 이전을 반대했다는 인상은 쉽게 받을수 있다. 팻 스탠던(Pat Standen)의 가족은 클럽이 이사갈 준비를 할 때 세인트 토마스 로드(St Thomas's Road)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사태를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대 초에 그와 인터뷰를 했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 지역에 새로운 축구 팀이 생긴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지. 당시에는 난 꼬맹이었지만 주위에서 온통 울위치 아스날의 위상과, 그들의 미래에 대해 논했거든. 이전을 반기는 사람과 꺼리는 사람들간에 크게 충돌이 있곤 했어. '교회의 미친 광신도들'이라고 아버지는 아스날이 오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곤 하셨지. 수많은 사람들이 과음과 신성모독에 대해 걱정한 것은 맞아.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당시 하이버리는 벽촌이나 다름없었어. 요즘이야 아스날 덕에 하이버리, 하이버리 하면 어딘지 조금은 알아주잖아. 그러나 당시에는 그 동네에서는 아무 것도 없었어. 영화관도 생기기 전이었고, 부모님은 웨스트 엔드로 이사갈만한 돈이 없었으니까. 동네 술집에서 한잔 하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큰 출혈이었지. 목수라서 당신께서는 술집을 들락날락 할만큼 돈을 받지 못하셨어.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일하는 남자들은 집에 갖다 주는 돈 이외에 더 쓸 돈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고, 하이버리의 관중들은 늘 떼로 모였어. 처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토요일날마다 '새로 온 애들 경기 보겠다고' 나가봐야 한다고 하셨지. 어머니는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어. 집 앞에 축구팀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자부심과 뿌듯함을 안겨 줬어. 많은 친구들이 첫 경기를 기념해서 현수막을 만들었어. 낡은 시트를 잘라 빨간 페인트로 "환영합니다. 우리 팀 대박나기를!"라고 글씨를 썼던게 기억이 나. 지금 들으면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근처 술집에서는 온종일 새 축구 팀 이야기 뿐이었어. 아버지는 늘 헨리 노리스가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때는 지금보다 선수들과 팬들이 함께 어울리던 시절이었지. 울위치 선수들 중 몇몇, 예를 둘만 들자면 조지 자비(George Jobey)와 작 러더포드(Jock Rutherford)같은 선수들은 근처 술집 단골이었고, 지역 행사나 비스무리한 것이 있으면 모두 참가했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클럽이 사람들의 반응을 슬쩍 떠보는게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해. 당시 벽보나 지역 신문을 훑어보면 어느날 어느 선수가 우리 가게 옵니다, 하는 광고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었어. 아버지 같이 단 한번도 축구 선수들과 만나지 못한 인간들은 좀 많이 궁금해 하더군. 그래서 하이버리에서 첫 경기 할 때 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반대자들이 부른 명칭대로 하자면 그 "침입자들"을 완전히 우리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노리스 생각대로 다 된거야."

  1913년부로 노리스의 아스날(이때부터 완전히 '울위치'라는 머리표를 땐다.)은 새 구장으로 이사를 완료했다. 하이버리에서나, 옛 집에서나 계속 성토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다시는 1시간 거리의 하이버리를 밟지 않겠다는 켄트의 어느 팬은 쓰디쓴 켄티쉬 인디펜던트에 결별의 편지를 날렸다. "헨리 노리스는 클럽의 영혼을 팔아 넘겼다. 그는 맘몬 교도다. 너 같은 졸부도 최후가 있을테니, 명심하고 있어라." 노리스는 무시했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새천년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1. 당시 런던은 대런던(Greater London)이라고 불리는 광역의 일부였다. 울위치는 대런던에 속해 있었지만 런던의 일부는 아니었고, 따라서 노리스는 북런던으로의 이전이 런던 내의 이동이라고 주장할수 있었던 것이다. 대런던은 1986년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2. 아서 코난 도일의 장편 추리 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Hound of the Baskervilles)에 나오는 개를 지칭. [본문으로]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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