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1970년대-어중간하게 하지마라

이제 하프웨이 하우스(하이버리 경기장 터널의 반쯤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다가, 그 중간선 위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는 임시 TV 스튜디오로 모습을 바꾸었다. 선수들과 감독들은 경기가 끝나면 뒤에 스카이, BBC, AXA 로고가 적힌 패널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인터뷰를 찍는다. "너저분한 곳이었어요, 정말. 텔레비전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너무 달라요." 밥 윌슨이 말했다. 하프웨이 하우스가 그 시절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증명이라도 하듯이, 밥 윌슨이 하이버리에서 '레전트 투어'를 할 때도 그 방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문은 늘 잠가져있다고 한다. 그러나 40여년 전, 하프웨이 하우스에서 했던 팀 미팅은 다시 영광의 날들로 돌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심약한 사람들은 버티기 힘든 모임이었다.

  1930년대부터 하이버리에는 어떤 비판에도 제약이 없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5년, 허버트 채프먼이 이사진을 놀래키며 허더스필드 시절부터 성공의 열쇠였던 팀 미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채프먼의 선수란 무지한 노예가 아닌, 그들 스스로의 활약에 대해 고민하는 법을 배우고, 동료들과 연대하는 존재라는 철학에도 부합했다. 조지 메일이 설명했다. "선수들을 바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또 그는 선수들 스스로 반성하여 진보하기를 원했죠." 이 전통은 채프먼 이후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1934년 갓 팀에 도착한 테드 드레이크는 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0으로 이겼고, 내가 그 두 골을 다 넣었어. 만족스러웠지. 아스날은 리그를 우승했고, 이제 여름 휴가를 떠날 것이고, 나는 적응도 잘했으니까. 옷을 갈아입고, 막 떠나려는 차 조지 앨리슨과 선배들이 팀 미팅을 열기로 결정했대. 비록 아스날이 리그를 우승했지만, 몇몇 부분에서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어. 게다가 이적하기 전에는 팀 미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 감독이 그저 잘 하라고만 했지. 정말 믿을 수 없던 것은 알렉스 제임스 면전에 대고 비판을 했다는 것이야. 이 나라 최고의 선수가 사실 게으르다는 이유로 욕을 좀 먹었지.

  조지가 내게 직접적으로 오늘 어떻게 했는지 말해보라고 하자, 두 골을 기록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했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런데 그게 실수였어. 알렉스나 클리프 바스틴 같은 팀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지. 팀에 헌신적인 플레이를 해야한다고. 조지 앨리슨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 이렇게 말했어. '테드, 주위를 둘러보고, 이 위대한 경기장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게나. 많은 사람들이 소명을 받아 그들 자신을 단련해왔기에 이 경기장이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라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네에게 기대하는 것이야. 스스로의 행동을 되짚어보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 분명 나는 상당히 당황했겠지. 그날 나는 아스날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하이버리의 관중들은 괜찮은 것 정도로는 안된다고. 자기만족이 곧 내리막길의 시작이라고. 그런 모임들이 우리를 굶주리고 헤이해지지 않도록 지켜주었어."

  그후 대략 30년 후, 1960년대 중반 주장이 된 프랭크 맥린톡이 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감독 버티 미와 같이 비판에 제약이 없는 팀 미팅을 열어 팀의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빌리 라이트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지요. 조지 이스트햄이나 조 베이커 같은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가 있었던 적도 있지만, 팀이 일심동체로 움직인 적은 없었어요. 선수들이 각자 할 일만 할 뿐이었죠. 그래서, 주말 경기가 끝나고 하이버리에 훈련을 하러 다시 모일 때, 하프웨이 하우스에서 주말에서 무엇이 좋고 나빴는지 토론을 시작했어요. 종종, 돈 하위나 버티 미가 참관을 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문을 잠가두었죠. 선수들만 들어오게요. 돈이 참관할 때는 칠판에 자석 동그라미를 붙여두며 전술을 짰습니다.

  제가 주도하면, 전 앞에 앉아 경기에 관한 의견과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가에 대한 의견도 끌어냈습니다.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지만, 모두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할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린톡이 인터뷰 중 의자에서 일어난다.), '야, 네가 그것 안했고, 너는 저것 안했잖아.' 제가 그들을 보고 욕을 하면, 그들이 다시 제게 욕을 하는 식이죠. 한 번은 피터 스토리가 제 말에 반기를 들며 소리를 지르더군요. '도대체 너는 얼마나 잘 한다고 그 지랄을 하냐?'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딱 너만큼 한심하게 했지만, 그래도 난 최소한 해결책이라도 내려고 하잖아.' 거칠고 솔직한 대화였지만, 이런 방법 없이 선수들이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는 선수도 없었지요. 찰리 조지가 제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화난 것이 빨리 가라앉더군요."

  팀 미팅을 드레싱 룸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밥 윌슨이 말했다. "버티 미가 시즌 2달 남기고 팀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떨기에 정신을 놓은 줄 알았어요. 이제 6~8주 정도 시즌이 남았으니, 가정사를 다 제쳐두고 더블을 향해 모든 것을 쏟으라고 하더군요. 옳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기강이 안 잡혀있다며 경고를 하는데, 너무 뻣뻣하게 점잔을 빼길래 제가 말했죠. '오, 버티, 말에서 내려와요.' 모두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버티는 키가 작아서 말 타려면 제일 힘들 사람이니까요!" 아스날의 선수마다 미팅에 다르게 반응했다고 한다. 밥 맥냅 같은 선수들은 비난 받는다고 생각하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찰리 조지와 레이 케네디도 마찬가지다. 존 래드포드는 버티 미가 감동적인 연설을 할 때마다 꾸벅 졸았다고 인정하며, 그 내용을 하나도 기억 못하고 있었다.

  하프웨이 하우스는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부인, 애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존 새멀스의 표현을 빌리면 "…좁은 방이었지, 8 피트 정도의 너비에 15 피트도 안 되는 길이. 한 쪽에는 바가 있어서 차나 커피와 샌드위치가 놓여있었어. 그런데 너무 작아. 경기가 끝나고 나면, 정말 모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어." 밥 윌슨이 말했다. "하루는, 진짜 날카로워 보이는 아스날 팬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좋은 사람 같아 보이더라구요. 그가 떠나고 프랭크 맥린톡에게 저 사람 누구냐고 물어봤지요. '매드' 프랭키 프레이저[각주:1]라고 하는 거에요. '리차드슨 형제[각주:2]의 히트맨.'이라고 프랭크가 말했어요. 그 당시 저는 조금 순진해서 히트맨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프랭크가 절 이상하게 쳐다보니 설명해주더군요.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빵.' 어안이 벙벙해서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윌슨이 런던의 뒷골목 때문에 난처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60년대 후반에, 선수들에게 셔츠나 다른 물건을 정말 싸게 팔던 업자가 하나 있었어요. 경기장 밖에서 기다리다가, 정말 좋은 셔츠 5장을 겨우 10파운드에 파는 거에요. 말 그대로 그가 밴의 뒤쪽에서 물건을 꺼냈는데, 범죄랑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어느날은 하이버리 바로 아래 있는 길에서 그가 코닥 필름을 헐값에 팔겠다고 나서더군요. 제가 아스날이 외국으로 원정을 떠날 때 사진사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알았나봐요. 그래서 저는 말 그대로 미끼를 물고 필름을 구입했어요. 2주 후, 버티 미가 하프웨이 하우스에 우리 모두를 집합시키더니 경찰이 조사를 나왔다고 하더군요. 이 근방에 엄청난 양의 장물이 거래되고 있는데, 특히 카메라 장비와 필름 위주라는 것이에요. 저는 아스날 유니폼 만큼 얼굴이 빨개져서, 의자에 얼굴을 쳐박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죠. 그 이후로 조금 철이 들었어요!"

  하프웨이 하우스에 대한 보비 굴드의 추억은 미묘했다. "그 미팅에 참가했던 선수 중 결코 잊지 못할 선수는 단연 피터 스토리입니다. 숨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조용한 사내였죠. 그는 강렬한, 독사 같은 남자였습니다. 어쨌거나, 한 번은 제가 그가 경기를 잘 치르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구요. 피터 스토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그가 제 앞에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거의 안 듣는 것처럼 보였어요. 제가 제 할 말을 마쳤을때 저를 지긋이 쳐다보며 다시 훑어 보더군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확실히 제 말을 들으며 좋아하지는 않아 보였어요.

  미팅이 끝나면 우리는 보통 클락 엔드 뒤에서 5:5 축구를 했지요. 피터가 그날 제 상대팀에 있었습니다. 경기가 시작하자 그가 저를 보고 능글맞게 웃더군요. 세상에, 스토리식 복수를 제대로 당했죠. 공에 맞아 쓰러지고, 태클이 날라오고…이것저것 많아요. 좌측에서, 우측에서, 중앙에서 밀어댔죠. 다른 선수들은 웃느라 난리가 났죠. 수년이 흐르고 나니 우습더군요. 하지만 모임에서 비난을 받아 팀메이트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해도 5:5 축구가 끝나면 싹 풀렸습니다. 경기장에서 남자들답게 푸는 것이죠. 이렇게하면 팀 스피릿이 열배는 괜찮아져요. 하프웨이 하우스를 결코 잊지 못할겁니다. 아스날이 70년대 초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에요."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2000년대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1. "Mad" Frankie Fraser. 평생의 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 전설적인 범죄자. 아직까지 살아있다. [본문으로]
  2. 60년대 영국의 가장 유명했던 갱중 하나. 크레이 형제와 대립했다. 후에 체포되었다. 지금은 형제가 서로의 연을 끊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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