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태동기-토튼햄 놈들

이버리에서 첫 경기를 치른지 어연 2년이 되었는데 아스날은 여전히 1부 리그로 돌아갈 기미가 안 보였다. 1915년 3월까지만 해도 드디어 돌아가나 싶었는데, 4월과 5월 내내 암울한 경기를 펼치며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포병대의 형편없는 경기력 때문에 관중들은 점점 빠져나갔고, 시즌 말에는 15,000명 정도의 열혈 팬들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1914-15 시즌의 마지막 경기, 아스날이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를 7-0으로 대파하는 순간에서 10,000명만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스날과 같이 런던에 있던 스퍼즈와 첼시가 1부 리그에서 제일 아래 두자리를 같이 차지했기에 둘도 같이 2부리그에서 뛰는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 만 명의 열혈 팬들은 당시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그들은 그 순간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 저 경기가 바로 아스날이 하부 리그에서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다가오면서, 노리스의 강한 아스날이라는 목표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1915년에서 1918년까지 그라운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50,000 파운드를 썼지만 경기 입장 수익은 영 신통치가 않아 수지가 맞지 않았다. 1914-15 시즌을 끝으로 정상적인 리그 일정이 끝나게 된 뒤로도 데이비드 예이츠는 전시 동안 틈틈이 축구를 보러 왔다. "대체 축구 경기를 보고 있는지, 애들을 군대로 끌고갈 대중 선전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더라구. 경기장 주변이 온통 '친구들과 같이 하이버리에서 경기를 보고 헤링게이 모병소에 오는 것이 어떤가?'라는 포스터로 도배가 되었어. 우리 가족 주위 사람들이 그 문구대로 했어. 그냥 언제나 모병소가 열려 있어서, 점선 위에다가 서명만 하면 끝이었지. 키치너 장군이 직접 와가지고 하이버리 관중들과 악수하면서 군대로 끌어들이려고 그랬다고도 하더라고. 이유야 뻔하지. 우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만큼 모이는데가 또 어디있겠어?

  그런데 내가 만일 전쟁터 나가서 총질하기 싫다, 이러면 말이야, 토튼햄 코트 로드의 스칼라 극장(Scala Theatre)에서 또 영국과 독일이 싸우는 전쟁 영화를 틀어줘요. 우스개 같지? 그래도 경기장 주위에는 늘 포스터가 떨어져있고, 아스날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입대하라고 적어두기도 했어. 아까 영화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영화 속 독일인들은 하나같이 미친 변태 놈들이고, 영국 군인들은 착하고 정의이자 진리지. 정말로 그때는 축구는 그냥 부차적인 문제였어. 또 재밌있는 건, 프랑스에서 포성이 심해지니까, 국가 위기에서 공놀이나 하냐고 축구 협회와 구단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커졌어. 그런데 나중에는 축구가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준다는 것이 눈에 보이더라고."

  4년 후 축구 리그가 다시 시작되었을때, 노리스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비열한 사기'에 연루되고 아스날은 1부 리그로 복귀했다. 1부 리그에 새로 두 자리가 더 생겼고, 원래대로라면 스퍼즈와 첼시가 강등에서 유예되어 그 자리에 있어야 했었다. (감독 레슬리 나이튼의 말을 빌리자면) 노리스는 몇몇 재무 담당자들을 통해 협회 회장인 존 맥케나를 설득시켜 아스날이 새로 확장된 1부 리그에 각각 3위와 4위로 마친 울브스와 반슬리에 앞서 들어가도록 했다. 동시에, 애꿎은 토튼햄만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노리스는 위원회와 모종의 연락을 취해, 하이버리가 웨스트 엔드에 가깝기 떄문에, 울버햄튼이나 반슬리로 소풍 가는 것보다는 훨씬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시켰다. 또한 첼시의 회장에게는 친분을 들어, 만약 아스날이 살아남는다면 첼시도 강등을 피할 것이라고 했다. 첼시는 살아남았고, 18표를 받은 아스날은 (놀랍게도) 승격했으며, 8표밖에 받지 못한 토튼햄은 강등당했다. 1908년 토튼햄이 남미 투어에서 선물로 받은 앵무새는 그 결정이 내려진 직후 숨을 거두었고, '앵무새처럼 아프다'(Sick as a parrot)[각주:1]라는 관용구가 탄생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런 묘기 대행진을 펼친 결과 북런던 이웃 토튼햄과의 사이는 영원히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울위치 아스날이 이사 온 것만 해도 불쾌했던 스퍼즈는 하이버리로 가는 지역 주민들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서만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1915년 말까지 토튼햄 헤럴드에는 아직도 "침입자들 경기를 보러 가지 마십시오."라는 광고를 실고 있었다. 토튼햄은 바로 1부 리그로 복귀해서 열렬한 팬들마저 놀래켰다. 그리고 1920년대 초에 그들의 분노를 아스날에 퍼부었다. 1922년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의 경기는 그야말로 피와 살이 튀기는 지저분한 경기가 되고 말았다. 레지 보어햄의 활약으로 아스날은 승점을 챙겨갔지만, <선데이 이브닝 텔레그래프>의 기자는 "기자가 본 축구 경기 중 가장 역겨운 경기었다…"라고 적어두었다. 징계 위원회에서는 스퍼즈의 버트 스미스와 알렉 그레이엄을을 각각 '부적절한 언어 사용'과 '보복행위'를 이유로 들어 징계했다. 두 팀간의 앙금은 경기장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후에 아스날의 단장이 되는) 밥 월같이 매우 조용한 사람도 "하이버리와 화이트 레인 밖의 길과 술집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뻔했습니다. 경기 전후 문자 그대로 칼날이 번뜩번뜩 하는게 사방에서 보였습니다."

  1990년 필자는 당시 80세였던 필립 존스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 시절 하이버리를 찾은 축구 팬들이 정숙하게 행동했다는 기존 견해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는 정말 아스날하고 스퍼즈하고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어. 전쟁 끝나고부터 그랬던거 같아. 남자들이 돌아와서 순수가 사라진거야. 내말은, 그 사람들이 하지 말하야 할 짓을 했다는 거야. 군대가 해산되고 실업률이 치솟아 올랐고, 사람들은 일자리도 없어서 다시 평범하게 사는 것도 힘들었어. 개중 몇몇은 정말 심했어.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도 분위기에 휩쓸렸잖아. 젊은이들은 반항을 하겠다고 늘 성질만 앞세우잖아.

  축구에는 그런게 더 많았어. 아스날이 마침 구장을 확장해서 관중이 더 몰려 들어왔거든. 스퍼즈나 첼시랑 경기를 하면 4만, 5만 정도가 몰려와. 하지만 구장이 가까워서 그런지 스퍼즈하고 경기할 때 사건, 사고가 더 많았어. 그러고보니 그때는 인종 차별도 없었구만. 가끔, 맨체스터에서 팬들이 떼로 몰려왔지만 그것보다 스퍼즈를 훨씬 신경썼어. 뭐 난투극을 벌이고 싶다, 하면 런드리 엔드(Laundry End)[각주:2]에 서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스탠드 위쪽부터 막 사람들이 화르륵 타올라. 처음부터 난리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 같이 어린 것들이 사태를 일으켰지. 멍청히 쳐다보면서 '뭘 쳐다봐?'같은 식으로 시비를 걸었지. 그러면 스퍼즈 쪽에서도 되받아 치고. 여기서 눈 돌리지 않는게 암묵적인 규칙이야. 아, 신성 모독 같은것도. 대부분 노동자였던 관중들은 씨 뭐시기니 별욕을 다 했지만, '신'(God)이라든가 '빌어먹을'(Damn)이라는 큰 단어는 말하지 않았지.

  자주 남의 모자를 낚아채가지고 던져버리거나 밟아버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어. 우리중 일부는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토튼햄에서 온 애들은 흰 색을 차고 있었고. 마침 레닌의 세력이 러시아에서 흰색 갑옷을 입은 왕당파를 몰아내던 때라, 꽤 마음에 들었지. 그 당시에 팀 유니폼과 맞춰 옷을 입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사실 개성에 가까웠지. 우리가 가끔 스퍼즈 팬들에게 야유를 퍼부으면, 주위에서 멍청한 놈이라며 당장 입 닥치지라고 했지. 안 가면 싸움을 벌이고 난장판이 되었어. 경찰들이 그때는 관중들 사이에 숨어있거나 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만약 잡히면, 뺨을 한 대 맞거나, 엉덩이를 걷어 차였어. 어떤 놈들은 스퍼즈 애들 뒤에 몰래 다가가서 바지를 내리고 그들 발에 오줌을 쌌지. 바보 같은 놈들이야.

  하지만 우리는 애송이었다니까. 세븐 시스터즈 로드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스퍼즈 애들과 맨날 싸우고 다녔던 깡패놈들도 있어. 주먹 쓰는거야 물론이고 칼도 휘두르고 그랬어. 20대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었는데, 경찰은 뭐가 어떻게 되가는지 감도 못 잡았어. 가끔 정말 칼로 찌르는 일도 있곤 했는데, 축구에 관한 일이라고 신경을 쓰지 않았나봐. 축구 이상의 문제였다니까. 아까 말했듯이 전쟁을 버텨내고 나니까 별의별 이상한 광경이 다 나타난 거야. 전쟁이 사람들을 더 폭력적으로 만들고, 내가 아는 사람들도 완전 병신으로 만들었지. 축구 보러 가서 그런 폭력성을 드러내는거고."

  팬들끼리만 싸운것도 아니었다. 아스날의 갑작스런 승격 이후, <토튼햄 헤럴드>에서 붙여준 '운이 억수로 좋은'과 '지루한'이라는 꼬리표가 아스날을 으레 따라다녔다. 늘 그랬듯이, 노리스는 스퍼즈를 공격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토튼햄 헤럴드>에서는 아스날이 60,000명 이상의 관중을 끌어본적이 한번도 없다면서 "이로부터 우리는 아스날 그 정도의 관중도 못 모을 정도로 아무도 관심없는 팀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라모 조롱했다. 1920년 1월 22일, 아스날은 당시 역대 최다 관중인 60,500명 앞에서 토튼햄과 경기를 치른다. 보통은 침울하던 <데일리 가제트>의 경기 분석은 그날따라 유독 흥분한듯 관중이 얼마 왔는지 최소한 3번은 언급했다. 마치 노리스가 기사를 쓴 것 같았다. 아스날과 관련된 기사에는 가끔 노리스가 손을 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운영에도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필립 존스가 인정다 시피, 1920년대 초 스퍼즈는 아스날보다 훨씬 좋은 팀이었다. 이제 클럽의 빚은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돈인) 8만 파운드에 달해있었고, 노리스의 투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다시 관중은 10,000명 가까이 떨어졌다. 블랙스톡 로드(Blackstock Road)에 사는 프레드 라이트(Fred Wright)씨가 데일리 가제트에 보낸 편지를 보면 "나는 요즘 그 친구들 경기 보는게 지겹습니다. 12년 동안 하이버리에 다녔는데, 다음 시즌인 1925-26 시즌 티켓은 사지 않을 것입니다. 노리스 씨가 약속했던 '슈퍼 스타'는 대체 어느 세월에 온답니까?"라고 써있다. 일년 후, 라이트 씨는 다시 데일리 가제트에 편지를 보낸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라며.

  하이버리의 잠자는 야수가 이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새천년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1. '크게 실망하다.'라는 뜻. [본문으로]
  2. 하이버리 북쪽 스탠드인 '노스 뱅크'의 당시 이름. 홈 팬들의 전용 구역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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