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6년 Orion Books에서 출간된 Jon Spurling의 저서의 번역본입니다.

태동기-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25년
8월 29일 토요일이었다. 영국은 법정 공휴일이었지만, <데일리 가제트>의 구독자 투고란을 보면 이슬링턴의 주민들은 느긋하게 지내고 있지 않는것 같았다. 어떤 주민이 신식 세탁기가 결코 기존의 손빨래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오지랖 넓은 어머니는 자신의 15살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작할 것이라는 계획에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녀 말에 따르자면 성교육은 지옥 직행법이라고 한다. 블랙스톡 로드에 사는 리차드 씨는 핀스버리 파크 픽쳐 팰리스 극장에서 최근 채플린의 무성 영화인 <황금광 시대>를 겨우 다 보고, 영화는 결코 연극 무대의 인기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명의 투고자 한 명은 스스로를 '영국인 파시스트'라 자처하며, 그의 당은 '표현의 자유를 결코 막지 않는 참을성 있는 단체'라고 하였다. 겉보기에는 그냥 옛날 이야기다.

  하지만 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사건들도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차차 보여주었다. 드센 런던이 혼돈에 휩싸였다. 로카노 클럽(Locarno Club)과 팔라이스 댄스 홀(Palais Dance Hall)에서 에서 단발을 한 '발랄한 젊은 여자'들이 '혼이 나갈 때까지 춤을 춰라' 행사 초대에 기쁘게 응했다. <타임즈>에서는 그 여성들의 '수치스러운 복장은 여성이 지녀야 할 정조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런던의 지하철 망도 가파르게 확장되었고, 정부는 피카딜리 지역의 교통 통제를 풀수밖에 없었다. 수도의 집값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이슬링턴의 하원의원은 500 파운드 정도 나가는 그 지역의 평균적인 집값을 두고 일반적인 노동자의 소득으로는 절대 집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발언했다. 사실 1920년대 중반 수도에 거주하던 노동자의 7할은  일주일에 2파운드 정도로 살아갔다. 플라스틱, 고무, 화학, 그리고 전기 같은 경공업이 영국 남동부에서 발달하기 시작했고, 남북간의 소득차는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1925-26 시즌 개막전, 북런던 더비를 보기 위해 하이버리에 몰려온 50,000명의 관중들은 축구 혁명의 초기 단계를 목격하고 있었다. 레슬리 엔더슨은 옛 동쪽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1930년대 초 허버트 채프먼이 부수기 전까지 그 스탠드가 있었어. 아주 부실한 나무 깔판 같은 곳이라서, 막 관중들이 흥분해서 발을 굴려대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거야.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때는 관중 대부분이 담배를 피었던거 같아. 다 피고 나면 꽁초를 그냥 버리고는 그걸 발로 나무 사이의 틈으로 밀어넣었지. 바닥에 꽁초가 널려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화제가 없었다는게 기적이야. 하이버리는 아주 무계획적으로 만든 셈이지. 허버트 채프먼이 부임했을 쯤에는 오만 명쯤 경기장에 왔는데 그래도 아직 경기장 반은 비어있었어. 아스날이 잘 못했잖아. '대체 이것들이 언제 한 번 우승해볼까?' 이러면서 팬들끼리 한탄하기도 했고. 클럽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회장이라는것만 봐도 팀 상황이 어땠을지 알만 하잖아!

  1925년에 모든 것이 변했어. 찰리 부찬이 아스날 데뷔전을 치르던게 엊그제 같구만. 정말 슈퍼스타의 기질이 충만했지. 우리 새 감독, 그러니까 그 최고의 감독인 채프먼 씨가 데려온거였거든. 그들이 우리 팀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데. 정말 별볼일 없는 팀이었는데, 갑자기 허더스필드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감독이 우리 감독이 된거라고. 벼락 맞은 기분이지. 하지만 정말 좋았던건 선수들을 새로 데려온 거야. 부찬은 초대형 계약이었어. 그 이적에는 할 말이 많아. 선더랜드가 우리팀에서 찰리가 득점할때마다 100파운드를 가져갔거든. 그래서 그가 골 넣을때마다 우린 농담으로 '100파운드 또 나가네.'하고 웃었지. 그땐 큰돈이었어. 하이버리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 경기를 볼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해준 아스날 선수는 그가 처음일꺼야. 그가 첫 경기에서 팀원들과 같이 나올 때, 사람들이 미쳐 날뛰었어, 그냥 점잖게 박수치면서 환호하는게 아니라. 20년대와 30년대, 채프먼이 스타 플레이어를 마구 사들이는게 관중들을 마구 끌어모았고, 부찬이 그 시발점이었어. 선더랜드에서 무더기로 골을 넣고, 잉글랜드 국가대표인 남자가 여기 있다는 거야. 위대한 선수라는 후광이 뿜어져 나왔어. 그리고 경기장에 가려고 관중들과 같이 지하철을 타는 20년대 스타일의 영웅이었어. 점잖기도 했지. 그가 막 이적했을 때는 경기력이 안 좋았거든. 그런데 어느날 지하철을 탔는데 옆에 애송이 두 명이 앉아서 그를 비난한거야. 그는 입도 빵긋 안했지. 그래도 그 스퍼즈하고 한 데뷔전때는, 채프먼이 감독으로 앉아있고 부찬이 경기를 뛰고 있고 해서, 막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이런 기분이었지. 그리고 정말 그랬긴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아마 시즌 초에는 좀 부진했던거 같아."

  (이제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포병대는 <데일리 가제트>에 따르면, 그 푹푹 찌는 날, 수비수인 앤디 케네디와 빌리 밀이 '먼저 하세요.'하며 서로 미루며 어영부영하다가 토튼햄의 지미 디목에게 기습당해 실점했고, 아스날은 결국 1-0으로 졌다. 아스날 팬들은 실망스레 경기장을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허버트 채프먼의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마라.'라는 말은 알고있었다. 타임즈도 아스날에 새로 온 스트라이커한테 꽤나 감명을 받았나보다. "그가 보여준 터치는 위대한 전략가의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다."라고 적어두었다. 부찬에 대한 반응은 놀라웠다. 경기 내내 마치 혁명가 같았던 그는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전 아스날 감독이었던 조지 모렐이 1910년에 "아마츄어 선수 주제 그런 터무니없는 돈을 구단에서 뜯어내려고 하냐?"라고 그의 교통비에 대해 한 말에 대들었던 것을 시작으로, 그는 높은 사람들과 부딛치는것을 결코 꺼리지 않았다. 선더랜드에서는 화려한 득점 퍼레이드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그 북동부 지역에서의 10년의 세월은 권력과의 투쟁의 연속이었기도 하다.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뛰는 보상을 가지고 관계자들과 마찰이 있었다. 선더랜드 역까지 도착해서 다시 집까지 5 마일을 걸어갈 수는 없으니 택시를 타야겠다는 것이다. 부찬은 결국 그 비용을 받지 못했다. 그는 계속 항의를 했고, 결과적으로 7년동안 국가대표에서 뛰지 못했다.

  프로 선수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어디서나 화려한 발재간을 뽐냈다. 캐나다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는 동안, 그는 몬트리올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 한 번 참가해서 2주치 주급만큼의 돈을 벌었다. 광신적인 영국 축구 팬 하나가 부찬의 행동을 사진으로 담아 축구협회에 보냈다. 축구협회는 그가 그 돈을 협회에 납부하라고 지시했다. 축구선수를 무식한 노예들처럼 취급하는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더랜드에 있는 그의 스포츠 용품점은 번창하여 그를 동시대 가장 부유한 선수가 되게 해주었다. 그의 소득을 부러워하는 FA는 '…귀하의 사업이 본래의 직업, 축구 선수를 방해하지 않나 보군요.'라는 말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은근히 협박이 섞여있는 그 편지를 무시하고 부찬은 열과 성을 다해 사업을 벌여 당시 축구선수들이 벌 수 있던 소득을 가볍게 넘겼다.

  그 거침없는 행보 덕에 레슬리 앤더슨에 따르면 그는 아스날 팬들에게 '오자마자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그를 매주 보는 대부분의 팬처럼, 부찬은 10년 전 서부 전선의 공포를 느꼈던 사람이다. 근위 척탄병(The Grenadier Guard)에 징병되어, 솜(Somme)과 파센달(Paaschendaele)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축구인의 길을 계속 걸어야할지, 혹은 교사가 될지 고민했다. 체육 교사였던 그는 건방진 아이들을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고 했고, 또 치통으로 골머리를 썩였다고 한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골초로 유명했다. 하루에 30개비를 피던 그는, 폐에 좋다는 소리에 파이프로 갈아탔다. 이 사실 대부분이 1920년대 아스날 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축구계의 얽히고 섥힌 정보통들을 통해 나온 정보의 파편이 레슬리 앤더슨을 안심시키기는 충분했다. "아, 드디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남자가 왔구나 싶었지. 무언가 초인적인 것을 보여줄 것만 같았어. 요즘 생각해보면, 부적 같은 존재였지. 금방 우리의 일부가 되었어."

  부찬의 친한 친구였던 조지 메일이 말하듯이, 우리의 영웅 찰리는 격정적인 남자였고, 완고한 사내였다. 아스날이 시즌 초 몇달간 미끄러지고 헤매고, 부찬이 4경기동안 득점에 실패하면서 그는 하이버리 관중들의 비난을 견뎌야만 했다. 지하철에서는 팬들이 입으로 욕하는 것을 들어야 했고, 10월에는 뉴캐슬에게 0-7이라는 절망적인 점수로 패배하면서, 아스날을 나가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채프만은 부찬같이 경험있는 선수가 팀의 전술을 완성시킬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각주:1](Saint James Park)에서의 비참한 패배 이후 열린 회의에서, 부찬과 채프먼은 아스날의 전체 역사를 바꿀 전략을 추진한다. 이제 아스날은 센터 하프 자리에 스토퍼를 둘 것이고, 중원에 연결고리를 하는 선수를 둘 것이라고 결정한다. 이 전략은 대형 선수들의 유입과 더불어 아스날을 30년대 최고의 팀으로 탈바꿈시킨다.

  아스날의 재정상황이 나아지면서, (특히 부찬을 중심으로) 여러 논란거리가 따라다녔다. 1927-28 시즌 4 경기를 남겨두고, 순위 아래로부터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포함된) 열 클럽이 강등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폼피[각주:2]가 하이버리에서 아스날을 만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정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런던의 도박사들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원정 승리에 돈이 쏠리는 괴현상을 목격했고, 하이버리에는 15,416명이라는 시즌이 시작한 이래 가장 적은 수의 관중이 모였다. 무언가 잘못되었고, 아스날 선수들이 설렁설렁 뛰기 시작하다 의혹은 증폭되었다. 필립 존스가 회상했다. "아스날이 네트에 공을 박아넣고 이길 생각이 없다는 것이 명확했고, 관중들은 선수들에게 불만을 토로했지. 부찬마저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거 같았어." 포츠머스가 실점 없이 두 점 앞서나가자, 이제 두 팀은 공돌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주 얼마후에 강등이 결정된 토튼햄은 아스날이 비기기만 했어도 평균 득점[각주:3] 우위로 살아남았을텐데도 그러지 못해 폭발했다. 필립 존스에 말에 따르면 이렇다. "다시 한번, 우리가 토튼햄을 해치웠다는 소문이 돌았어.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그리고 노리스가 모두 한 셈인가. 토튼햄이 그 후 몇년동안이나 1부 리그에 돌아오지 못했는데 참 다행이었지. 돌아왔어봐, 아주 피와 살이 터지는 싸움이 일어났을꺼야." 일년 후, 축구협회 위원은 노리스를 축구계에서 무기한으로 추방하고, 포츠머스 전을 추궁했다.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도록 지시하였습니까?" 위원이 물었다. "헨리 경은 그런 그런 억측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의 변호사가 답했다. 폼피와의 경기 2주 후, (찰리 부찬의 말에 따르면) 노리스가 아스날 선수 모두에게 '최신 냉장고라고 하는 뭐시기'를 선물했다는 소문이 1920년대 축구계의 도시전설처럼 남아있다. 그 말에 아스날 수비수였던 조지 메일은 웃었다. "그가 집에 쌓아둔 여러 제품을 가지고 우리가 놀리곤 했지요. 축구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산 그런 물건들이 남부로 오는 댓가인 노리스에게 받은 뒷돈으로 샀다고 수군거렸어요.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글도 열심히 썼고 사업도 성실히 한 사람이에요. 그저 돈 버는 법을 아는 남자였을 뿐이에요."



머릿말

태동기
침입자들-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1)-자리 잡기-첫번째 경기-토튼햄 놈들-아스날의 첫번째 슈퍼스타

1930년대
채프먼이 하이버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고백:건설 인부들-타지 마할-"위이 알렉"-가장 가슴쓰린 경기-하이버리의 전투-"이 친구들 만날 때가 됐군"-야유 받은 친구들:브라인 존스-고백:테라스 청소부-은막 위에서

1940년대
뻥 터져버렸네-내 축구는 어디 있지?-"계집들이 여기에 있어"-컬트 히어로:조 머서

1950년대
환한 불빛 아래서-구사일생-앙증맞은 것들이 돌아왔다네

1960년대
텅 빈 공간-가장 위대한 인간-두 스탠드 이야기-규칙 따위 필요 없어-고백:정비사, 악사-런던의 악동들

1970년대
부활-어중간하게 하지마라-머리부터-잊혀진 영웅-찰리 조지 만세-컬트 히어로:테리 만시니-때리고 부수고-편견 없이?(1)-교감하기-컬트 히어로:윌리 영-불세출의 천재

1980년대
검투사들-라디오 매치-야유 받은 친구들:하이버리의 무능력자들-이게 아직도 축구로 보이니-컬트 히어로: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찰리 왕자님의 길-아스날 액션 그룹-고백:마스코트, '부자 되세요' 걸-"문을 열고 나가 아스날의 일원이 되어라"-컬트 히어로:페리 그루브스-막대기와 돌맹이-고백:팬진 편집자-기업정체성-변하지 않는 것이 뭐가 있으리

1990년대
정권교체-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악의 순간-사요나라 노스 뱅크-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2)-개좆?-컬트 히어로:앤더스 림파-환상특급-심장마비-베르캄프 원더랜드-초전박살-저스트 던 잇-맨체스터 촌놈 길들이기-아름다운 날-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3)-이상 기류-록키를 추억하며

새천년
바바붐(1)-사인해서, 봉인하고, 배달 완료-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4)-고백:변호사, 암표상, 경기장 관리인, 안내인-타이틀 냄새가 난다-바바붐(2)-권력 이동-무적의 팀?-컬트 히어로:레이 팔러-외인부대-고요를 깨우다-편견 없이?(2)-감회어린 곳-유럽 제패의 길-초침은 흘러가고-그리고 마지막

감사의 말




  1. 뉴캐슬의 홈구장. [본문으로]
  2. 포츠머스 FC. [본문으로]
  3. 당시에는 골득실이 아닌 경기당 평균 득점으로 순위를 결정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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